본문 바로가기
미제사건정리

개구리 소년 범인, 대한민국 미제사건 영화 아이들

by 모모로로아빠 2023. 4. 11.
728x90
반응형
SMALL

 

 

오늘은 대한민국 영구미제사건 중 하나인 개구리 소년에 대한 내용을 포스팅해볼까 합니다.

1991년에 발생한 이 사건은 당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는데요.

이유는 다섯명의 아이가 한 번에 실종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많은 가설이 돌았지만 가장 최근에는 네이트판에 글이 올라면서 다시 수면 위에 오르기도 했죠.

 

그 내용을 담아서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야기에 앞서 개구리 소년 다섯 아이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개구리소년 영구미제사건 출처 '영화 아이들' 사진

 


목차

 

  • 사건의 발생 시기
  • 수사과정
  • 다시 돌아온 아이들
  • 사망시기
  • 살해무기
  • 네이트판에 올라온 하나의 글
  • 글쓴이의 생각

 

 

 

1. 사건의 발생 시기

 

다섯 아이들의 실종시기인 1991년 3월 26일

이 날은 여느때와 조금은 다른 날이었습니다.

 

5. 16 이후 중단 되었던 지방자치제가 30년 만에 다시 부활하여

공휴일이자 성서초등학교의 개교기념일을 앞둔 다섯 학생들이 실종되었던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종된 개구리 소년 사진

이른 아침 오전 8시에 아이들은 조호연 군 집 마당에 모여 8시 20분이 되었을 때 집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8시 40분경 다섯 아이들은 학교를 지나치다 만난 동창 김태용 군에게 함께 도롱뇽을 잡으러 가자고 제안을 합니다.

하지만 김태용 군은 이들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8시 50분경 아이들은 와룡산 입구 부근 와룡 슈퍼마켓 앞

쌍마섬유에서 선원지 방향 쪽으로 가는 걸 조호연 군의 친형에 의해 목격이 됩니다.

 

9시 4분경, 와룡 슈퍼마켓 위로 막대기와 깡통을 들고 와룡산 입구로 향하는걸 지역 주민에 의해 목격됩니다.

목격자의 진술로는 '두 시간 정도 안 걸리겠나'라는 말을 들었다 합니다.

 

9시 4분 직후에는 다섯 아이들이 함께 걸어가는 걸 같은 학교 동창 이태석 군이 목격합니다.

 

오후 12시 30분경, 와룡 슈퍼 인근에 있는 주택에 거주하는 이태석 군과 또 다른 동창인 김경열 군에게

와룡산을 다녀왔는데 같이 가자고 제의를 했다고 합니다.

 

김경열 군 말에 따르면 아이들 주머니에는 무언가 한가득씩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오후 2시경, 아이들이 와룡산 불미계곡 좌측 편 산길을 따라 올라가는 걸 지역 주민에 의해 목격이 됩니다.

 

오후 4시경, 평리 중학교 1학년이었던 박구환 군이 무학사 인근 약수탕에서 아이들이 도롱뇽을 잡고 있는 걸

목격했다고 진술합니다.

박구환 군에 증언에 따르면 도롱뇽을 한 마리만 주면 안 되겠냐 물었고 아이들은 거절을 하고 산을 다시 올랐다 합니다.

 

그로부터 약 30분인 오후 4시 30분경에도 지역 주민에 의해 아이들이 목격이 됩니다.

 

오후 6시경, 성서 농협 앞 횡단보도 신호대기 중인 아이들을 지역주민이 목격합니다.

 

오후 10시경, 아이들이 귀가를 하지 않자 걱정된 부모님들은 아이들을 찾기 시작합니다.

 

와룡산에 가도 아이들을 찾지 못한 부모님들은 성서 파출소에 신고를 합니다.

 

이로 인해 경찰인원과 지역주민을 포함한 50여 명이 새벽까지 와룡산을 샅샅이 뒤지고 다닙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인 3월 27일 오후 1시경 공중 수색도 하며,

아이들을 찾는데 모든 인원이 총동원되어 와룡산에서 아이들을 찾기 시작합니다.

 

3월 28일 오전 8시

달서구 송현동 영신아파트 놀이터에서 다섯 명의 아이들로 추정되는 인물을 발견하였지만

가출했던 다른 무리로 밝혀지면서 사건은 다시 미궁으로 빠지게 됩니다.

 

아이들의 목격 시간을 토대로 다시 재수사를 하게 되는데,

26일 오후 6시경 아이들이 신호대기 중인걸 봤다는 목격자의 증언은 확신이 없었기에 배제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의 정확한 최종 목격시간은

3월 26일인 오후 4시 30분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본 지역주민이 목격이 마지막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이후로 대대적인 수사 작업이 시작되었고,

정말 많은 경찰인력과 군인, 교사, 지역주민까지 총동원되어 400명의 가까운 사람들이 와룡산 일대와

그 주변에 아이들이 갔을 만한 장소를 전부 파헤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아무 소득 없이 아이들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실종이 된 한 달이 지난 4월 중순경까지 계속해서 많은 인원들을 데리고 수색을 하였지만

아이들의 어떠한 흔적도 찾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이 이슈화가 되면서 대한민국에서는 개구리소년 찾기 운동을 하게 되고,

대통령령에 따라 경찰은 전 수사인력을 동원해 아이들을 찾을 것이라는 명령이 내려집니다.

 

오랜 시간 수색을 하였지만 끝내 아이들을 찾지 못한 채 이 사건은 미궁으로 빠지게 됩니다.

 

 

 


 

 

2. 수사과정

 

당시 아이들 실종사건이 많이 없었던 시대적인 배경에 경찰들도 수사에 난항을 겪었다.

당시 경찰들은 탐험놀이에 심취되어 있던 아이들이 모험을 하다 시외로 넘어갔고,

거기서 돌아오질 못한채 유괴범에 의해 납치가 되어 어디에선가 앵벌이를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정신적으로 이상한 불량배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런 내용을 토대로 수사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이때 아이들을 찾기 위해 동원되었던 경찰 총동원 인원은 연 31만 8천 명,

전단지 배부만 1천여 만장

전국차원의 수색과 잠수부의 투입 그리고 저수지에 있는 물을 모두 빼면서까지

아이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대 규모의 인원이었다고 기록됩니다.

 

그 이후 아이들에게 현상금을 걸게 되면서 전국적으로 이 사건이 화두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수백 여건의 오제보와 그리고 허위제보 장난전화까지 끊이질 않았습니다.

 

자신이 납치범이며 몸값을 요구하는 전화도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그 밖에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앵벌이, 껌팔이, 신문팔이 지하철 전국을 단속해 가며 아이들을 찾아다녔지만

성과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많은 이들이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이들은 찾지는 못했습니다

 

 

 


 

 

3. 다시 돌아온 아이들.

 

실종이 되고 11년이 지난 2002년 9월 26일 오전 11시 30분경,

대구 성산고등학교 신축공사장 뒤편 와룡산 산기슭에서 도토리를 줍던

달서구 주민 두 명이 사람의 뼈로 보이는 물체를 발견하고

그 주변을 살펴보자 아이들 신발과 트레이닝 복을 발견하게 됩니다.

 

발견된 장소는 신축공사현장 뒤에서 500M 떨어진 와룡산 중턱으로

와룡산 4부 능선에 위치되어 있는 곳이며, 이곳은 사건당시 인적이 없고

통행을 하지 않는 길이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의 집에서 3.5km 정도 떨어진 장소에서 아이들은 돌아오지 못한 채

유골로 발견이 됩니다.

 

유골이 발견되면서 다시 수사가 진행되고,

국과수 및 법의학팀 그리고 한국법과학연구소에서 타살의 가능성을 염두해고

사망시기와 사건의 경위를 조사하는데

2달이 지난 결과 아이들의 부검 소견은 타살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이에 수사본부는 타살 경위에 맞춰 수사를 진행하게 되고 당시 사건 현장 부근에

거주했던 거주자들을 중점으로 다시 재수사를 하게 됩니다.

 

 


 

 

4. 사망시기

 

사망시기는 법의학적인 결과로 사건 당일쯤 살해가 되었고, 그 뒤 곧장 파묻힌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다행히도 야생 동물에 의한 훼손은 없었으나

유골 발견지점에서 20kg의 돌이 두개골을 누르고 있었고 이로 인해 두개골이 변형된 점을 파악하여

뼈에 수분이 있었기에 변형이 가능한 부분이라 추측하고, 살해 이후 바로 묻혔다는 점을 입증하였습니다.

 

 


 

 

5. 살해무기

 

우선 개구리소년 사건이 다시금 화두에 오르기 전까지 무기에 대한 가설은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두개골이 파손되었기에 단단한 망치의 뒷부분, 공업용 가위, 돌등 추측성 발언들뿐 정확한 무기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기라

사이코패스라는 단어가 다시 한번 수면 위로 오르기도 했었죠.

 

 


 

 

6. 네이트판에 올라온 하나의 글

 

 

 

네이트판에 올라온 글은 범이 사용했을 거라고 추측되는 살해 무기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특정된 무기는 '버니어캘리퍼스' 목수들이 사용하는 공업용 자입니다.

 

이를 본 범죄 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굉장히 설득력이 있는 증언이고

이 글을 쓴 사람을 만나서 더 들어볼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글이 화두가 되면서 다시 개구리소년 이야기는 화재가 되었고,

"그것이 알고 싶다" , "당신이 혹하는 사이" 등 프로그램에서 내용이 다뤄지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네이트판에 글에는 특정된 범인은 없었지만

추측성의 불량한 중고등학생의 소행일 것이다라는 추측 글도 올라왔었습니다.

 

그 뒤로 '버니어캘리퍼스'로 두개골의 상처와 면밀히 비교를 해보았지만

아쉽게도 조금은 다른 결괏값이 나오게 되면서

개구리소년 사건은 미궁으로 빠지게 됩니다.

 

 


 

 

7. 주관적인 글쓴이의 입장

 

 

 

대부분의 미제사건은 초기 수사방향에서 오판으로 인해 해결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신빙성이 없는 증언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증언을 토대로 수사가 진행이 되고

결과적으로는 그 증언이 틀렸음을 암시하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쉽게도 골든타임을 놓친 사건에 대해서는 수사는 길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이 듭니다.

 

제 기억에도 개구리사건에 대한 억측은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외계인에 의해 납치되었다, 납치되어 서울에서 앵벌이하는 아이들을 보았다.

버스에 타서 허름한 차림을 하고 있었고 20~30대로 보이는 남성이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다 등등

개구리소년 사건이 이슈화가 되면서 반대로 엉터리의 제보 또한 수사를 함에 있어서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는 개구리소년을 담당했던 수사 전직 책임자가 개구리소년은 '타살이 아니다'라는 주장까지 했었는데요

그로 인해 네티즌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실종된 아버지였다 라는 억측으로 인해

유가족에게 더 아픈 상처를 주기도 했었습니다.

 

미스터리로 남겨진 이 사건이 더 아쉬운 점은

특정한 범인도 단서도 없다는 점에서 정말 풀리지 않는 미제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현대 기술이 발전하면서 미제사건이 하나둘씩 풀어지곤 있지만 이 사건은 어느 단서하나 없는

정말 미궁에 빠진 미제사건이라는 점이 아쉽기만 합니다.

 

하루빨리 진범이 밝혀지고, 

유가족이 다시 아이들을 만날 때 발걸음이 무겁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관련 내용을 담은 제 유튜브 채널입니다.

 

 


 

 

 

 

728x90
반응형
LIST

댓글